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요리 (문단 편집) === 중세 === [[고려시대]]에는 고려가 불교국가인 탓으로 육식 문화가 쇠퇴하였다. [[송나라]] 사신이 왔을 때 고기를 올려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도축하는 방법이 실전되어 불에 던져 넣거나 구타해 죽이는 방법을 썼고 그 결과 [[내장]]이 터지는 등으로 누린내가 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도경 제23권 잡속(雜俗) 도재(屠宰)편에 나오는 얘기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물론 [[이자겸]]의 생일날 들어온 고기가 너무 많아 썩어났다는 기록 등에서 보듯 육류를 아주 안 먹은 것은 아니지만 특정 재료를 사용한 요리가 발달하려면 소비 계층이 폭넓게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적성국에서 온 사신도 아닌 우방국에서 온 사신에게도 저 정도 밖에 안되는 요리를 대접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고려의 고기조리법은 크게 후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때부터 [[맥적]] 등으로 알려진 요리의 맥도 [[고려]] 초 동안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금하다시피 하면서 많이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맥적]]이나 [[너비아니]]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요리다. 단, 해산물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으로 보아선 네 발 달린 동물만 안 먹었을 뿐이지 해산물 및 조류는 즐겨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의 이자겸에게 바쳐진 고기도 닭, 꿩 같은 조류라고 보면 상호모순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고기 요리가 재부흥한 것은 [[고려]] 후기 [[원 간섭기]]부터였다.[* 물론 [[고려시대]]라고 해서 고기를 아주 안 먹은 것은 아니고 이규보의 문헌집 등을 보면 쇠고기를 섭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 몰래 암암리에 먹었지 대놓고 먹지는 못했다. 일본 역시 육식을 금기시하는 풍토가 7세기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기록을 보면 멧돼지고기, 사슴고기 등 온갖 고기를 약 등 온갖 은어를 대면서 몰래몰래 먹었던 것을 감안하면 똑같은 불교문화가 자리잡았던 고려시대 역시 약용으로 먹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국가나 다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돼지고기를 금한다는 중동 국가들도 알고 보면 돼지고기를 몰래 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특히 중동에도 의외로 기독교도가 많이 살고 있기에 중동의 돼지고기 소비를 이들이 주도한다지만, 다 알면서 기독교도에게 돼지고기를 사서 먹고 자기는 몰랐다는 식으로 면피, 아니면 숲속에 몰래 돼지를 키워 먹는 등등 갖은 방법으로 돼지고기를 즐기는 무슬림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동 국가들이 돼지고기를 먹는다고는 말 안하는 것처럼 고려 역시 전반적으로 육류 섭취를 금기시하던 시대로 봐야 한다.] [[조선시대]]는 국가적으로 소의 도축을 법으로 일부 금했으나 사실상 상당한 수의 소를 도축하고 소비했다. 관련 [[http://egloos.zum.com/coldstar/v/3026435|기록]]에서 1844~1849년동안 일본으로 소가죽 수출량이 12만 714매로 연간 2만 119필의 소가 도축되었으며 1882년 이후 청나라로의 [[https://news.samsung.com/kr/%ED%88%AC%EB%AA%A8%EB%A1%9C%EC%9A%B0-%EC%97%90%EC%84%B8%EC%9D%B4-%EC%95%8C%EA%B3%A0-%EB%B3%B4%EB%A9%B4-%EC%A1%B1%EB%B3%B4-%EC%9E%88%EB%8A%94-%EB%A7%90-%EA%B3%A0%EA%B8%B0%EB%82%98-%EA%B5%AC|최대 수출품]]도 소가죽이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전국에서 하루에 소 5백필이 도축된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당시 조선은 소가죽은 수출하지만 쇠고기는 수출하지 않고 국내에서 소비한데다가 수출용 이외의 소의 도축량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의 소고기가 국내에 공급되고 있었다. 또한 중근세 일본에서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611&cid=59020&categoryId=59025|쇠고기하면 조선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정도다. 또한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불을 쓸 때 물을 적게 써서 찌느냐, 많이 써서 삶고 끓이느냐, 아예 불을 쓰지 않고 말리느냐로 크게 구분되었던 한국의 요리법에 불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구이]]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한식의 가장 널리 퍼진 조리방식이었던 찌는 [[누르미]]가 [[누름적]]으로 바뀌고, 갈비와 불고기로 대표되는 고기구이로 바뀌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